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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독 늦바람을 타고 대세에 합류하던, 뽐내기 좋아하고 노는걸 좋아하는 그저 그런 학생이었다. 공부를 너무 못하지도, 너무 잘하지도 않는 딱 그 정도의 어중간함. 그게 당시에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였던 것 같다.


중학교를 막 입학했을 때, 나 역시도 공부에 미쳐본 적이 있다. 치열하게 민사고를 졸업하고 아이비리그에 가서 꿈을 펼치는, 너무나도 환상적이고 멋있는 사람의 수기를 읽고 난 후였다. 물론 누구나 과거가 있듯, 나 역시 일종의 ‘사건’이 있었고 결국 그저 밍밍하고 싱거운 16살 인간이 되었다.




외고, 자사고, 특목고 열풍이 한창이였던 2007년쯤이었다.


나 역시도 외고 입학을 목표로 하루에 2/3의 시간을 보내는 학원이 있었는데, 주말에도 거의 항상 학생들을 학원에 불러 모아내곤 했다. 하루는 학생들의 영어 수준을 평가하겠다며 뜬금없이 영어시험을 치뤘는데 그 당시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몇 주 뒤, 무슨 이유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무료했던 것 같다. 사촌형과 네이버에 서로의 이름을 검색해 보는 짓(?)을 했는데, 내 이름은 굉장히 특이해서 그런지 거의 결과가 없었다. 그런데 유독 눈에 띄는 페이지가 있었고 그것은 바로 몇 주 전, 학원에서 했던 영어시험 결과였다. 설마 그 이름이 나일지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랬다. 그게 바로 나였다.



“교환학생?”


며칠이 지나고 밤이 되었다.


부모님과 치킨을 시켜 먹으면서 하나의 가십거리로 얘기를 꺼냈는데 아버지의 반응이 꽤나 의외였다. 말인 즉슨, 나의 인생에서 이런 기회가 또 있겠느냐,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나는 17년을 살면서 이렇게나 즉흥적이고 갑작스러운 결정을 내려본 적이 없다. 성격이 워낙 꼼꼼하고, ‘too much thinker’ 라서 모든 판단과 행동에는 항상 긴 준비기간이 수반되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순간, 별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난 준비가 되었다. 당장 떠나고 싶었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살던 지역에서는 가장 유명하고 유서 깊은 고등학교였다. 나와 같이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설레는 학교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을 보며 나도 너무 설렜지만, 그들과 내가 기대하고 열망하는 topic은 전혀 달랐다. 고등학교 생활도 너무 즐거웠지만 이미 나의 마음은 이 땅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즐거웠던, 막무가내의 고등학교 1학년 2학기가 채 시작되기 무섭게 나는 자퇴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남대문 시장에 가봤다. 내 몸만한 캐리어 가방도 2개나 사고, 미국에 가게되면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 줄 선물도 샀다. 


이제 정말 며칠 남지 않은 시간이 슬프셨나보다. 카운트다운이 들어간 순간부터 어머니가 그렇게 많은 눈물을 보이셨다. 비록 불효자였던 나는 엄청난 판타지에 취해 어머니와는 다른 의미의 카운트 다운을 했었지만, 시간의 의미가 어찌되었든 시간은 서서히 흘러갔다.




[ D-1 ]


미국이라… 미국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한국에서는 정말 가끔 외국인을 보게 되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는데, 이젠 내가 그 신기한 사람이 되는건가?

한국에서 영어는 항상 100점이었는데 현지에서는 그게 먹힐까?

외국인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보통의 내 또래 친구들이라면 긴장했을 것 같았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생전 처음 가보는 곳에 온통 낯선 사람 뿐이라니. 어찌보면 당연한건가 싶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빨리 가고싶었다. 내 무모한 모험심이 처음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낯선 땅으로 가기 직전, 나는 가장 익숙한 내 방 한쪽 구석에서 그렇게 잠이 들었다.





드디어 그렇게도 기다려왔던 날이 밝았다.


이른 새벽부터 부모님은 분주히 움직이셨고, 난 잠이 덜 깬채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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