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처음 느껴보는 두근거림을 안고 도착한 인천국제공항은 내 상상 속 그것보다도 훨씬 크고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드디어 내 인생에 첫 모험이 시작되는구나...!
중학교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본 제주행 비행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나의 큰 착각이었다.
줄서서 짐을 부치고 절차를 밟는데만 2시간이 걸렸다. 물론, 나는 너무 설레어서 힘든지도 몰랐지만 부모님께서는 상당히 힘들어 하셨고 우여곡절끝에 모든 탑승 준비를 마치고 가족들과의 마지막 식사를 함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진도 찍었는데 예전의 기억을 들여다보면 이따금씩 느껴지는 아련함이랄까... 사진 속 나와 가족들의 모습은 정말 아련한 모습이었다.)
주말 신파극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 내게도 일어날 줄이야.
공항 출국 게이트를 통과하고 자동문이 닫힐 때 까지 누나도, 어머니도, 그렇게 무뚝뚝하셨던 아버지조차 슬픔에 가득찬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난 정말 눈물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뻔한 장면에 왜 이렇게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펑펑 울 것만 같아서 빠르게 탑승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신을 좀 차리고 나니 서서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출국 게이트 안쪽에 수 많은 상점들과 환전소,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빼곡했는데 그렇게 낯선 기분이 들 수가 없었다. 짧은 시간만에 철저히 혼자가 된 느낌을 난,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체감하고 있었다.
일단 내가 탈 비행기의 탑승구를 찾아야 하는데 처음 타보는 거라 역시나 헤매고 또 헤맸다. 17살 나이에 폼나게 출국하고 싶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이렇게 다 내 생각과 다르다니... 탑승구를 찾고 30분 가량을 기다리고 나서야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비행기 안은 생각보다 넓었고, 내가 앉을 자리는 생각보다 좁았다. 외국인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에 비해 한국인의 수는 적었다. 좌석마다 이어폰, 슬리퍼, 베게, 담요 등의 편의용품이 있었고 좌석에 앉았을 때 나의 눈높이에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화면과, 그 속에 보이는 아메리카 대륙이 있었다. 앉아서 좌석을 내 몸에 맞게 조금씩 세팅 한 후 안전벨트를 착용 하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난 잘할 수 있을거야"
자신감이 가득했던 소년인데도 불구하고 약간은 두려웠다. 그래서 스스로 최면을 걸듯 몇 번을 중얼거리고는 이내 긴장이 풀려 잠들었다.
기내식을 2번이나 먹고 낮과 밤이 한 번씩 지나갔다.
중간에 스튜어디스가 나눠 준 미국 입국 신고서와 I-94라는 외국인 출입국 기록지를 작성하는데 혹시 실수로 잘못쓰면 미국에서 쫓겨나거나 감옥가는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스튜어디스를 붙잡고 물어물어 작성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나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매우 자유롭지만 그만큼 엄격한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 같다.
좌석에 있는 화면에 비치는 '남은 거리 30km'
드디어 비행기가 착륙 준비를 시작하고, 사람들은 다들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빠진 짐이 없나 빠르게 살펴보고 장시간 비행에 지쳐버린 몸을, 좁은 공간이지만 나름대로 스트레칭 해주었다.
시카고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이미그레이션, 즉 출입국관리소를 거치게 되는데 일단 노란 선 뒤에서 긴 줄에 합류하여 대기하다가 심사관이 손짓으로 부르면 가서 심사를 받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몇몇은 심사관들과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는데 대부분 노란선을 안지키고 서있는 그런 유치찬란한 이유였다. 이윽고 심사관이 내게 손짓했다. 나는 긴장한 얼굴을 애써 감추면서 "Hi" 하고 인사했는데 심사관의 표정은 무덤덤해서 굉장히 겁을 먹었다. 일단 열 손가락의 지문을 찍고 사진도 찍는다. 그리고 왜 왔는지, 얼마나 있을건지, 어디서 지낼건지 등을 물어보고 여권과 비행기 안에서 작성했던 서류 등을 살펴보고는 또 질문들을 던졌는데 잘 알아듣지도 못했을 뿐더러 유학원에서 알려준대로 심사관과 눈을 꼭 마주보며 방어적인 대답을 늘어놓기 바빴다.
어려웠던 심사를 통과하고 일반적으로는 짐을 찾고 세관검사 후 나가면 되지만, 나 같은 경우엔 환승을 해서 또 미국 국내선 비행기를 한 번 더 타야했기 때문에 그 쪽으로 갈 수 있는 게이트를 찾아 나섰다. 영어에 자신이 있었지만 막상 나가서 미국인들과 대화를 통해 길을 물어야 하고, 필요한 것들을 찾아야 하는데 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몇 번을 헤매던 중, 운이 좋게 한국인 직원분을 만날 수 있었고 나의 목적지인 위스콘신주의 Madison 공항으로 출발했다.